태극도주 조철제와 감천2동

어느 종교나 특히 사이비 종교들은 작금에 이르러서도, 서민의 삶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와서 비논리적 구라, (종교 창시자들의 의도된) 허무맹랑한 사기 – 신화나 전설이 아닌 – 허위 가상 거짓 스토리를 만들어서 “스스로” 자멸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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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속 붉은 원안에 있는 집에서 내가 1960년 9월 태어났고 내 4형제가 모두 여기서 태어났으니, 이 집은 59년 이전에도 있었으나, 위 사진이 찍힌 싯점은 1971-72년 입니다.


우측 슬레이트집 (slate)이 태극도 회실이고 60년말에는 돌담이 없었습니다 (1971년 돌담 공사함)


67년생 내 동생이 세살 때, 여기서 미끄러져서 떨어졌고, 63년생 내 동생은 떨어지는 67년생 동생을 끌어안고 같이 떨어졌고, 난 어른들께 혼날까봐 줄행랑을 쳤고, 이후 우리 집안이 난리가 나서 71년 돌담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어떻든 태극도, 대순진리회 관련 그 어떤 글이나 썰, 구라에도 “태극도 대강전(위 사진 큰건물)”이나 종탑 관련글이 없습니다. 인면수심으로 가득찬 그들도, 최하의 양심에 기인하여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은 오로지 우리 할아버지 사비로만 지어졌습니다. 개인의 사재를 털어서 이만한 건축물을 지어줬다고 기록하기 싫은 탓일까요? 그건 엄연히 사취이고 착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태극도를 믿으면 영생(영세불망 만사지기)한다던 태극도주 조철제는 말년에 병상에 누워서 헛것을 보면서 허공에 대고 온갖 욕설과 고함소리를 내면서 온갖 고통,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 생전 내뱉기 힘든 신음속에서 다년간 시달리다가 1958년 초봄에 비극적으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이후 1958년 – 1970년 감천2동은 무법천지로 변했습니다. (트러블 메이커 대순진리회 박한경의 태극도 금고 절취 사건 및 서울 야반 도주 사건 이후 그나마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 조철제 사후 1968년 박한경의 야반 도주까지 10여년간, 그 당시의 감천2동은 처참할 정도로 가난과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공중 도덕이나 질서, 법도 도덕도 없는 무법 천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백주 대낮에도 여기저기서 폭력이 난무했지만 결과적으로 태극도 관련, 위로는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 차경석 조철제는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고, 후계자를 제대로 두지못한 박한경 역시 온전하게 생을 마감하지 못했으리라 쉽게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대순진리회 공식 기록으로는 1987년 암으로 두 차례 수술하였고 1996(丙子)년 1월 23일 악화된 암으로 죽을 때까지 병으로 시달렸다고 합니다. (박한경은 1917년생임으로 암 수술 당시 71세 고령임)

이를 재고찰하자면 태극도주 조철제 말년과 박한경의 말년이 수도자 및 제자들의 배임, 횡령 사건 등등 복사판으로 너무나 흡사한 과정을 재반복합니다.


(천도교쪽은 후계자가 있었지만 강일순 차경석 조철제 박한경은 후계자를 두지못하고 비극적으로 사망함)

이 글을 쓰거나 이 사이트를 남기는 이유 (태극도컴 Taegeukdo.com)는 따로 있습니다.


일제 시대와 전후를 거치면서, 국난을 역이용한 희대의 망나니 조철제에게 사기 당해서, 살아있는 평생 내내 빈곤과 가난, 굶주림과 학대, 고통속에서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아들 딸 손자까지 유산으로 남겨줌으로서, 100여년을 비명속에서 삶을 영위했을 감천2동 태극도촌 주민들에게 이 글을 남김으로 조금이나마 그들이 저승에서 작으나마 위안이 될 것입니다.


난 조철제 따위나 박한경 나부랭이를 비난,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나 따위가 무슨 중생 구제 운운하겠습니까?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사실을 1인칭 기법으로 남길 뿐입니다. 희대에 망나니 조철제가 저지른 짓거리는 세상을 경악하게 했고, 아직도 진행중이며, 이에 여기다 하나하나 다 남겨둠으로, 이 글을 볼 단 한 명에 태극도민, 우리 스스로에게 적으나마 정신적 위안을 갖고 자위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글 (사이트)입니다.